패키지뭉쳐 (2024-02-07 오후 1:41:08)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오히려 불확실성만 확대되고, 마치 끝없는 사막의 모래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축의 비밀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했던 학자들의 연구와 가설들을 작은 부분들로 분해해 살펴보면서, 상상 그 이상으로 뛰어났던 초기 고대 문명의 모습을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은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피라미드의 비밀을 풀기 위한 여정의 첫 시작은 이집트 문명의 탄생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물의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인류 문명의 발달과 성장은 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물을 통해 생존력을 획득한 현생인류는 구석기 시대의 어둠을 지나 1만 2천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온이 10도 가량 크게 상승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떠오르게 됩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을 중심으로 높은 비옥도를 가진 초승달 지대에서 1만년 전부터 문명과 도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일 강 주변에서 발전한 이집트 선사 문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주목해야 합니다. 북부 아프리카부터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사막의 모습. 사하라, 리비아, 누비아 등 황량한 사막 그 자체입니다. 이집트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며 월 평균 강수량이 8mm, 년 총 강수량이 10cm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오아시스, 생명의 터전이 바로 나일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강은 무려 6천 6백 km에 달합니다. 이는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보다 길죠나일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강은 사실 두 가지 주요한 지류, 즉 탁한 청나일강과 맑은 백나일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강의 물의 색깔은 서로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렇게 별도로 명명되었습니다. 백나일강의 원천인 빅토리아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호수로, 주변은 아프리카의 특성인 열대우림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반면에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 시작하여 흘러내리는 청나일강은 부드러운 흙과 실트를 강물에 풍부하게 공급하면서, 강물 속에는 부엽토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습니다. 5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는 4개월 동안은 장마가 쏟아져 내리는 기간으로, 이 때 강물은 물량이 급증하면서 체롤 지역을 지나 이집트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 때 강물이 넘쳐 흘러 이집트를 물바다로 만드는 홍수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집트인들은 이 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신의 의지로 해석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렇게 나일강이 범람하는 주기에 따라 1년을 세 가지 기간으로 나누었습니다. 범람이 계속되는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 동안은 '아퀘트'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 기간 이후 물이 걷히면서 영양분이 풍부한 퇴적토에 밀과 보리 씨를 파종하고 성장시키는 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 동안은 '페렛'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수위가 가장 줄어들고 곡식을 수확하는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동안은 '셈무'라고 불렸습니다. 범람 기간 동안 농지는 모두 물에 잠겨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와 건축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사 과정에서 토목과 건축에 대한 지식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피라미드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범람이 끝나면, 영양분이 풍부한 검은 토양이 쌓이게 되는데 이부분을 캐멧이라고 이집트에서는 부름니다이집트는 사막에 둘러싸여 있어 거의 비가 오지 않지만, 나일강의 범람과 수로를 통해 넓은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선정 여부는 나일강의 범람을 얼마나 넓은 지역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매년 범람으로 인해 농지의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측량과 수학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범람을 대비하여 수로와 제방을 만들었고, 강물을 양수하여 수로를 채우기 위해 '샤두프'라는 양수 장치를 이용했습니다. 이 장치는 한쪽에는 통, 반대쪽에는 추를 달아 작은 힘으로도 효율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기술은 피라미드 건설에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식량 공급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삼각주는 파피루스와 로터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두 식물은 각각 하이트와 상이집트를 대표하는 식물로, 생명력과 권영을 상징합니다. 각종 무덤 벽화를 보면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대의 밀, 보리 농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는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여자는 뒤에서 씨를 뿌리며, 다가오는 추수를 기다립니다. 강가에는 대추야자와 모과나무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카우스 여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고물과 시한 틀을 확인한 결과, 밀과 보리뿐만 아니라 호밀, 갈풀, 올리브 등의 다양한 식물이 재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델타 지역은 파피루스와 로터스로 둘러싸여 있었고, 이 지역에는 다양한 종류의 오리, 거위, 새들이 있어 풍부한 단백질을 공급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사냥은 여가 생활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나일 삼각주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집트인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를 결정할 때 이를 고려하였습니다. 대각선을 연장하면 나일 삼각주를 가르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의 축복이 주는 것은 단순히 식량과 고기로서의 생명 유지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고유하고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피루스'였습니다. 파피루스는 갈대의 일종으로, 그 긴 줄기를 칼로 얇게 잘라낸 후, 차 시킨 응물을 먹고, 다시 망치로 두드려 펴 만들어진 것입니다. 파피루스로 제작된 종이는 그 가벼움과 똘똘 감을 수 있는 특성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불로 구운 도토리보다 훨씬 더 간편하게 문자와 지식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지식이 세대를 거쳐 축적되는데 기여하였고, 피라미드 건설 기술이 차근차근 발전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단순히 종이로서의 역할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섬멸을 보면 튼튼한 밧줄이 되어 보트를 끌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성인몰이 밧줄은 관계와 지중해를 항해하는 선박에 사용되었으며, 파피루스 뭉치를 이용해 소용돌이 모양의 배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바구니, 상자, 샌들, 촛불 등 실생활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나 재미있는 사실은, 파피루스로 만든 소형 배가 잉카 문명의 모체인 티티카카 지역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잉카에서 사용된 이 갈대의 이름은 '토토라'이며, 이집트에서의 파피루스와 마찬가지로 신발, 바구니 등 다양한 물품 제작에 사용되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식량 생산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양한 자원의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일강은 이집트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강물의 흐름과 정 반대로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이를 이용해 상하류 이동이 손쉽게 가능하였습니다. 수학자 라스프킨은 자동차가 없던 시대에 수상 교통이 육상 교통보다 약 70~75배 정도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는 이집트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문명과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선박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선사시대 항아리에 그려진 범선의 이미지를 통해, 선박 사용의 깊은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인들이 선박을 이용한 해상 운송에 익숙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더불어, 하트셉수트 장녀의 푸트장 원정 벽화에 그려져 있는 60미터가 넘는 대형 바지선은 이집트인들이 버디아 노벨스와 같은 큰 화물까지 운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의 지리적 조건은 동쪽은 홍해, 사방은 사막으로 둘러싸인 천연 동백으로, 외부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이점 덕분에 요소팜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의 정력에 따라 나라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항상 침략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다른 지역보다 초기에 급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빠른 성장은 종종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집트는 혁신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문화 때문에 점차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왕국의 람세스 2세 시대를 거치면서 이집트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000년경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집트는 더욱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던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과 알렉산더 대왕,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 시저 등 강력한 힘을 가진 부상국들에게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습니다.